[네이버-매거진S] 마린보이의 청춘은 끝나지 않았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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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수 : 2832 | 등록일 : 2018-03-30 11:47:38 | |||||||||
http://sports.news.naver.com/general/news/read.nhn?oid=064&aid=0000004251 <원문 주소 클릭>
'수영-가족-은퇴' 박태환의 아직 못다한 이야기
11월 초 제주전국체전이 열린 제주실내수영장, '마린보이' 박태환이 가는 곳마다 ‘구름’ 소녀팬들이 몰려들었다. 손만 살짝 들어올려도 '꺄악!' 비명이 쏟아졌다. 관중석의 소녀들은 '바다의 왕자 마린보이'를 열창했다. 스물다섯 박태환은 승승장구했다. 리드미컬한 스트로크가 살아났다. 절대적이고 압도적인 레이스였다. 주종목인 자유형 400m(3분47초40)에선 2위보다 8초, 자유형 200m(1분46초25)에선 4초 이상 앞섰다. 계영 400-800m에선 마지막 ‘앵커’로 나서 폭풍 스퍼트를 선보였다. 선행 영자를 모조리 따라잡는 괴력의 ‘만화수영’이 다시 시작됐다. 계영 400m에선 마지막 300~400m 구간을 47초79의 기록으로 주파했다. 한국 신기록 페이스였다. 박태환의 ‘불사조’ 레이스가 제주에서 되살아났다. 인천아시안게임의 아쉬움을 뒤로 한 채 심신이 지친 가운데 출전한 대회였다. 늘 반복되는, 수영장 문제로 훈련양도 충분치 못했다. 압도적인 실력은 도망가지 않았다. 2005년 대회 4관왕, 2007년 5관왕, 2008년 5관왕, 2013년 4관왕에 이어 또다시 4개의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10년을 한결같이 시상대 가장 높은 곳에 섰다. 싱그러운 미소가 돌아왔다. "인천아시안게임에서 실망감을 안겨드렸는데 변함없이 응원해주시니 감사할 따름"이라며 웃었다.
▶2014년 '수영영웅' 분투기 박태환은 10월29일 제주전국체전 자유형 400m에서 3분47초40의 기록으로 가장 먼저 터치패드를 찍었다. "인천아시안게임 때(3분48초33)보다 빠르다"는 말에 "아, 인천 이야기는 하지 말아주세요"라며 웃었다. 특유의 뒷심이 살아났다는 칭찬에 겸연쩍어했다. "전 사실 변한 게 없는데… 저 늘 이렇게 해왔잖아요"라고 반문했다. "막판 스퍼트도 그렇고, 기록도 늘 보여주던 평균기록인데, ‘그때’ 못 보여준 것뿐"이라고 했다. 그의 말대로 지난 10년간 박태환은 늘 한결 같았다. "인천아시안게임에서 보여주지 못한 것뿐"이다. 런던올림픽 이후 지난 2년간 ‘수영영웅’ 박태환은 힘든 상황에서 분투했다. 4년간 70억원을 후원했던 ‘든든한 스폰서’와 결별했다. 특히 올시즌은 스물다섯 박태환에게 유난히 힘겨웠던 한해였다. 지난해 인터넷 인기강사 '삽자루' 우형철씨가 후원한 5억원과 국민들이 십시일반 모금한 7000여 만원으로 호주전지훈련을 이어갔다. 인천아시안게임의 해, 모든 후원이 끊겼다. 국가적인 슬픔이 많았던 한해, 가라앉은 분위기속에 기업들은 주판알만 튕겼다. 환경이 힘들어질수록, 노력은 배가됐고, 기록은 오히려 향상됐다. 2월 뉴사우스웨일스챔피언십에서 자유형 100m 한국최고기록(48초42)을 썼고, 7월 김천대표선발전 경험삼아 출전해본 개인혼영 200m에서 한국최고기록(2분00초31)을 작성했으며, 8월 팬퍼시픽수영선수권에선 자유형 400m 시즌 세계최고기록(3분43초15)와 함께 3연패를 달성했다. 힘들수록 이를 악물었다. 인터뷰 때마다 "비전이 없다면 보여줘야 한다"고 했다. “좋은 기록을 보여주면 후원사가 생길 것”이라는 믿음이었다. "진짜 죽을 것처럼 힘들어도 '어거지'로 버티게 된다. 내가 더 잘해야, 더 보여줘야 후원사도 생기고 더 좋은 환경에서 운동할 수 있다"고 했다.
준비한 것을 다 보여주지 못한 인천아시안게임은 그래서 더욱 진한 아쉬움으로 남았다. 기록종목 선수로서 박태환의 꿈은 언제나 ‘세계기록’이다. 이번에도 박태환은 ‘세계기록 페이스’로 연습하고 도전했다. 연습기록을 언급하자 박태환은 냉정하게 답했다. “연습 때 세계기록을 깬 것은 중요하지 않다. 연습 때 잘해봐야 아무 소용없다. 물론 연습과정은 중요하지만, 연습때 열심히 해왔다는 것을 경기장 안에서 보여주는 것이 ‘실력’이다. 이번 아시안게임은 그런 면에서 아쉬움이 남는다. 실전에서 아예 못 보여줬다. 선발전, 직전 대회에서 월등한 기록이 나왔는데, 정작 해야될 시합에선 못 보여줬다.” ▶‘노골드’ 인천아시안게임은 ‘실패’ 아닌 ‘배움’ 지난 9월21일 인천 문학박태환수영장에서 펼쳐진 인천아시안게임 남자 자유형 200m 첫 경기, 박태환은 마지막 15m를 남겨두고 ‘일본 신성’ 하기노 고스케에게 일격을 당했다. 막판 역전을 허용하며 동메달을 땄다. 주종목인 자유형 400m에선 3분48초33의 기록으로 동메달을 추가했다. 박태환의 400m 최고기록은 3분41초53이다. 불과 한달전 팬퍼시픽수영선수권에서 3분 43초96으로 올시즌 세계1위 기록을 찍었다. 불과 한달만에 48초대로의 퇴보는 스스로도, 상식적으로도 납득할 수 없는 결과였다. 3분48초대는 본인의 말대로 “훈련중 페이스 체크할 때도 수시로 나오는 기록”이다. 현장에서 만난 볼 감독은 "베이징, 광저우, 상하이에선 부담없이 편안하게 경기했다. 박태환이 홈에서 이렇게 큰 대규모 국제대회를 치르는 것은 처음이다. 져서는 안된다는 과도한 기대감을 느끼고 있다"고 했다. "부담감을 내려놓으라고 계속 이야기하고 있지만, 쉽지 않다. 모든 한국인들이 그의 금메달을 원한다. 전담팀의 물리치료사가 박태환의 몸이 긴장돼 있다고 하더라"고 전했다.
대회 후 박태환의 설명도 같았다. "그냥 부담감이 너무 컸다. 자유형 200m 경기 전날 어깨 근육이 풀어져버렸다. 소위 '시합몸'이 아니었다. 경기 직전에 이런 적은 처음이었다. 당혹스러웠다"고 했다. "그냥 심플하게, 생각이 많았던 게 이유다. 생각이 많으면 몸이 경직된다. 심지어 레이스 중에도 생각이 많았다. 50m는 이렇게, 100m 는 이렇게, 하기노도 신경 쓰이고, 쑨양도 신경쓰이고, 복잡했다. 내 레이스를 하지 못했다"고 털어놨다. 자유형 400m, 여전히 몸은 무거웠고 부담감은 더 커졌다. 레이스가 뜻대로 풀리지 않았다.누구보다 속이 탄 것은 박태환 본인이었다. "하마터면 너무 답답해서, 중간에 뛰쳐나갈 뻔했다"고 했다. 안방에서 첫 메이저대회라는 중압감이 컸다. 베이징올림픽, 광저우아시안게임, 상하이세계선수권 모두 원정 금메달이었다. 자신의 이름을 딴 ‘박태환수영장’에서 ‘3관왕 3연패’에 대한 부담감은 어깨를 짓눌렀다. 하지만 박태환은 인천아시안게임을 '실패'라고 말하지 않았다. '배움'이라고 말했다. "아쉬움이 많다. 하지만 실패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의미 있는 대회였다"고 자평했다. "미흡한 경기를 통해 배웠고, 안방에서 뛰면 내가 이런 것에 약하다는 것도 알았다. 부담감, 압박감을 이겨내지 못한 심리적 부분은 내가 앞으로 잘 대처해야 할 부분이다.“ ▶‘10년의 정상’ 마린보이의 청춘은 끝나지 않았다 박태환의 시간은 거꾸로 흐른다. 박태환은 16세인 2005년 제주에서 열린 동아수영대회 자유형 400m에서 3분50초37의 처음으로 한국최고기록을 작성했다. 25세인 올해 자유형 100m와 개인혼영 200m에서 한국최고기록을 찍었다. 인천아시안게임 계영 800m에서도 후배들과 함께 한국최고기록을 달성했다. 지난 10년간 자유형 100-200-400-1500m는 물론 개인혼영, 계영종목에서 10년을 한결같이 신기록을 경신하며, 세계 정상권을 유지하고 있다. 여전히 ‘청춘’이다. 박태환이 말하는 롱런의 비결은 "계속 새 목표를 가지고 성실히, 착실히, 열심히 준비하는 것뿐"이다. “힘든 점이 많았지만 주변에 도와주시는 분들이 많았고, 최선을 다했기 때문에 지난 10년간 정상을 유지해올 수 있었다. 앞으로 남은 수영인생도 그렇게 보내고 싶다. 목표를 향한 강한 의지와 열정을 이끌어내려고 한다”고 했다. 박태환이 선수생활 중 최고의 순간으로 꼽는 순간은 당연히 대한민국 수영의 새 역사를 쓴 베이징올림픽 금메달이다. 그러나 최고의 레이스로 꼽는 장면은 2007년 호주 멜버른세계선수권 남자자유형 400m다. ‘롤모델’ 그랜트 해켓을 꺾고 세계를 제패하며 ‘박태환 시대’의 도래를 알린 이 경기에서 마지막 50m, 폭풍 스퍼트는 숨막히게 짜릿하다. 이후 ‘반전의 레이서’ ‘기적의 스퍼트’는 박태환의 트레이드마크가 됐다. 숨이 턱까지 닿는 상황에서도 마지막 50m 구간을 26초대로 끊어내는, 독한 습관은 지난 10년간 몸에 밴 혹독한 훈련량 덕분이다. 박태환은 "어렸을 때부터 그렇게 훈련을 해왔다. 아무리 힘들어도 마지막엔 더 빠른 속도로 나와야 한다. 힘들어도 힘을 내야 한다. 마지막에 스퍼트해서 무조건 마무리를 잘해야 된다"고 했다. 하루 15㎞를 헤엄친다. 토악질이 올라올 때까지 죽을 힘을 다해 물살을 가른다. 박태환표 ‘막판 괴력’ 스퍼트는 언제 봐도 짜릿하다. 세계적인 수영클럽의 코치들이 너나없이 눈독 들이는 박태환의 명품 스트로크 역시 그렇다.
'수영천재' 박태환은 스스로 “재능과 노력의 비율을 5대5”라고 했다. "어렸을 때부터 1등을 많이 하긴 했지만 내가 최고라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다. 그때는 수영에 소질이 좀 있으니 노력해야겠다고만 생각했다"고 했다. '슈퍼탤런트'를 언급하자 박태환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반대로 생각하면, 나도 하는데 다른 사람들은 왜 못할까. 후배들은 나보다 젊고, 키도 크고, 팔도 길고, 체력도 좋고… 결국 하기 나름인 것 같다. 훈련할 때의 마인드, 스스로 준비를 어떻게 하느냐가 가장 중요하다." 박태환은 완벽주의자다. 수온 0.1도, 수심 0.1m에도 흔들리는 민감한 종목, 0.01초로 승부가 갈리는 첨예한 종목인 만큼 모든 레이스를 현장상황에 맞춰 완벽하게 준비한다. 전세계 에이스들이 총출동하는 올림픽에서도, 1인자로 나서는 국내 대회에서도 박태환의 준비 자세는 한결같다. 수건으로 스타트대를 꼼꼼히 닦는 의식도, 가슴팍과 팔다리를 두드리며 마사지하는 모습도 그렇다. 작은 대회라고 해서 방심하는 법이 없다. 모든 레이스에 혼신의 힘을 다하는 프로다. 목욕탕같은 연습풀, 웜업, 스윔다운용 풀이 따로 없는 국내 대회의 열악한 환경에서도 불평하지 않는다. 언제나 ‘폭풍적응’하는 편을 택한다. “내 장점은 어떤 환경에도 잘 적응한다는 점이다. 이렇게 열악한 환경에서 기록이 나온다면 더 자신감이 생길 것”이라는 긍정의 마인드다. 박태환은 천생 선수다. 인천-제주전국체전에 인천시청 소속으로 2년 연속 출전해 총 8개의 금메달을 선물한 박태환은 “전국체전은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선수라면 누구나 출전해야 하는 대회다. 아시안게임 이후 좋은 모습을 보여줘야겠다는 생각을 많이 한 대회였다. 향후 몇 년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수영인생을 마감할 때까지 계속 출전하고 싶다”고 했다. ▶‘매너갑’, 월드클래스의 품격을 입증하다 박태환의 지난 10년은 화려했지만, 되돌아보면 늘 햇빛만 비춘 날들은 아니었다. 때론 바람이 불고, 때론 비도 들이쳤다. 정상과 나락을 함께 경험하면서 소년은 성장했다. ‘영웅의 조건’, 영광, 시련, 극복의 과정을 거치며 박태환은 점점 강해졌다. 첫 출전했던 2004년 아테네올림픽 스타트대에서 부정출발로 실격했다. 박태환은 2008년 베이징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딴 이듬해 2009년 로마세계선수권에서는 예선탈락의 좌절을 맛봤다. 절치부심한 2010년 광저우아시안게임에서 아시아신기록, 3관왕에 올랐다. 2012년 런던올림픽 400m 예선에선 예기치 못한 실격 해프닝에 울었다. 오뚝이처럼 일어서 값진 은메달 2개를 목에 걸었다. 2014년 인천아시안게임, 안방 부담감과 경쟁자들의 틈바구니에서 은메달 1개, 동메달 5개, 역대 아시안게임 최다메달(20개) 기록을 썼다. 위기에서 박태환의 강인한 멘탈은 빛을 발했다. 늘 1등만 하던 박태환이 처음 2위, 3위로 터치패드를 찍은 메이저 대회였다. 박태환은 예기치 않은 결과에도 침착하고 쿨했다. 주변인, 팬들조차 아쉬움에 표정관리가 안되는 상황에서 박태환은 담담했다. 예기치 못한 동메달에도 미소를 띠며 주변을 챙겼다. 자유형 200m 레이스 직후 하기노 고스케에게 건너가 악수를 청하며 예를 갖췄다. '박선생 CF' 도발을 했던 '동생' 쑨양에겐 머리를 쓰다듬으며 친밀감을 표했다. 자유형 400m 이후에도 마찬가지였다. 1위에 오른 쑨양의 팔을 번쩍 들어올리며, 금메달을 축하했다.
시상대, 기자회견에서도 미소를 잃지 않았다. “내 이름을 딴 박태환수영장에서 수많은 팬들이 응원해주시는 것이 너무 감사하고 뿌듯했다. 메달색과 관계없이 '잘했다'고 소리쳐주셨다. 보답은 환하게 웃어드리는 것뿐이라고 생각했다"고 했다. 금메달보다 빛나는 챔피언의 품격을 보여줬다. F 하기노 고스케는 대회 MVP를 수상한 자리에서 박태환의 따뜻한 매너를 언급했다. 존경심을 표했다. "박태환 선수는 훌륭한 선수이기도 하지만, 이번 대회를 통해 박태환 선수의 친절하고 뛰어난 성품을 확인했다. 박태환 선수께 감사한다"고 말했다. 박태환은 "내게도 좋은 추억이 됐다”고 화답했다. “어릴 때는 그렇게 하지 못했다. 지금도 아직 어리지만 수영계에서 인지도, 경험이 생기면서 여유가 생긴 것같다"고 했다. "내게 도하, 광저우때와 인천은 달랐다. 세계적인 선수들과 시상대에 서는 것만으로도 큰 의미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 하기노는 첫 아시안게임에서 금메달을 땄다. 도하때의 나와 같은 기분일 것이다. 쑨양은 인천에서 처음 아시안게임 400m 금을 땄다. 광저우때 나와 비슷한 기분이었을 것이다. 그렇게 공감이 되더라. 진심으로 축하할 수 있게 됐고, 스스로를 위로할 줄 아는 방법도 알게 됐다." 도하 때의 거침없던 박태환과 인천에서의 매너 넘치는 박태환, 어느 박태환이 더 좋은지 물었다. 똑똑한 대답이 돌아왔다. "레이스 할 때 편한 건 아무 생각없이, 거침없이 했던 도하 때가 좋았다. 지금은 경험도 쌓이고 레이스 운영에 노련미와 여유도 생기고… 장단점이 있다. 나는 그 ‘두 박태환’이 합쳐진다면 좋겠다.” 대한민국이 ‘도하의 수영천재’ 박태환과 ‘인천의 잘자란 청년’ 박태환을 똑같이 사랑하듯 스스로도 그랬다. “그 둘이 합쳐지는 날이 오겠죠?"라며 싱긋 웃었다.
가장 외롭고 힘든 순간을 버티게 해준 건 역시 굳건한 '가족의 힘'이다. 인천아시안게임을 앞두고 7년을 동고동락해온 전담팀장 매니저가 떠났다. 위기속에 온가족은 '박태환 프로젝트'를 위해 똘똘 뭉쳤다. 아버지 박인호씨가 경영하는 팀GMP에 ‘매형’ 김대근 실장이 전격투입됐다. 호주 시드니에서 수영클럽을 운영했던 경험과 유창한 영어로 마이클 볼 감독과 전담팀을 조율했다. 박태환의 마음을 누구보다 잘 읽어내는 '멘토' 누나 박인미씨도 마케팅실장으로 힘을 보탰다. 대회가 시작되면 가족은 철저히 ‘그림자’로 산다. 남모를 가슴앓이가 시작된다. 육순의 아버지 박인호씨는 행여 부담이라도 될까 먼발치에서 소리없이 아들의 훈련모습을 지켜본다. 수영 현장을 20년째 지켜봐온 아버지는 전문가가 다 됐다. 물 잡는 모습, 어깨 돌리는 것만 봐도 컨디션을 한눈에 알아본다. 경기 전후에도 먼저 전화하는 법이 없다. 아들의 연락을 말없이 기다릴 뿐이다. 무소식이 희소식이다. 수영 관련 이야기는 아예 꺼내지도 않는다. 가장 힘든 순간, 필요로 할 때 ‘비빌 언덕’이 돼주면 그뿐이다. '엄마' 유성미씨는 인천아시안게임을 앞두고 마지막 호주 전훈에 동행했다. 연일 빵과 고기, 외식으로 연명하는 아들을 두고볼 수 없었다. 여행중 골절된 발목이 퉁퉁 부은 채, 한국산 음식재료를 바리바리 챙겨 비행기에 올랐다. 냄비, 밥솥까지 공수해 날랐다. 장정 7인분, 날마다 다른 식단, ‘엄마표 집밥’을 뚝딱뚝딱 해먹이면서도 힘든 줄 몰랐다.
시상식 때마다 ‘매의 눈’ 박태환은 숨어있는 가족을 귀신같이 찾아낸다. 시상식 꽃다발을 누나에게 건네고, 가족들을 향해 힘차게 손을 흔든다. 제주전국체전 남자계영 400m에서 4번째 금메달을 목에 건 박태환이 관중석 꼭대기의 ‘엄마’ 유성미씨와 눈을 맞추고 "아빠는?" 입모양으로 가족을 살뜰히 챙겼다. 요즘 박태환은 태희, 태은 두 어린 조카와 사랑에 푹 빠졌다. 훈련에 지칠 때면 누나집을 찾아 조카들의 재롱을 보며 시름을 잊는다. 올림픽, 세계선수권, 아시안게임을 모두 제패한 ‘그랜드슬래머’ 박태환을 일으키는 에너지는 가족과 팬이다. “국민들이 응원해주시는 것에 힘입어서 버티는 부분도 많고, 가족의 힘도 있고, 조카도 둘이나 있다보니 즐거움도 생기는 것같고"라며 웃었다.
▶이런 선수 또 없습니다
"박태환같은 세계적인 선수가 품격없이 다뤄지는 것이 안타깝다." 인천에서 만난 이에리사 인천아시안게임 선수촌장(새누리당 의원)의 ‘촌철살인’ 한마디가 가슴을 후벼 팠다. 태릉선수촌장 시절부터 지켜봐온 ‘애제자’ 박태환이 인천아시안게임에서 나홀로 7경기를 뛰고, 1개의 은메달과 5개의 동메달을 따내며 분투하는 모습을 가까운 곳에서 지켜봤다. 대한민국 스포츠 역사를 다시 쓴 ‘월드클래스’ 엘리트 선수가 제대로 대접받지 못하는 현실에 대한 안타까움을 직설적으로 표현했다. 세계 수영의 벽은 높다. 한국 수영의 역사는 박태환 전과 후로 나뉜다. 박태환이 나서지 않은 2013년 바르셀로나세계수영선수권, 대한민국 대표팀에 메달은 전무했다. 8명이 겨루는 결선무대에 이름을 올리는 것조차 하늘에 별따기다. 박태환이 금메달을 놓친 2014년 인천아시안게임, 한국 경영대표팀의 성적은 ‘노골드’였다. 박태환은 대한민국이 배출한 유일한 올림픽 수영 챔피언이자, 변명도 편견도 통하지 않는 기록경기, 개인종목에서 지난 10년간 월드클래스를 유지하고 있는 유일한 선수다. ‘수영 불모지’ 대한민국에서 1m84의 키로 2m에 육박하는 선수들을 줄줄이 밀어내고, 시상대 가장 높은 곳에 오르는 기적같은 선수다. ‘수영영웅’ 박태환과 동시대를 살며, 그의 레이스를 지켜볼 수 있는 것은 어쩌면 다시 오지 못할 행운일지 모른다. 'T.H.PARK'의 이름과 기록을 전광판에서 확인하는 즐거움, 시상대에서 애국가가 울려퍼지는 순간의 뿌듯함이 다시 오지 않을까봐 두렵다. 박태환의 다음 시즌 계획은 아직 확정되지 않았다. 수억원에 달하는 전담팀 운영과 자비 전지훈련의 부담감은 여전히 크다. 훈련지 선정, 전담팀 구성 등을 고민하고 있다. 인천아시안게임 400m 금메달 기자회견에서 쑨양이 “힘든 상황에서도 후원을 아끼지 않은 361에 감사한다”고 말했을 때 옆자리 박태환의 표정은 묘했다. 박태환은 “옆에서 웃었지만, 씁쓸했다. 쑨양은 잡음이 많은 시즌이었지만, 어찌 됐든 금메달을 땄다. 잡음이 많은데도 기업이 끝까지 믿고 후원해준 것은 대단한 일이다. 내게도 그런 후원사가 있다면 그 회사를 위해 모든 걸 쏟을 것같다”고 했다. 팬들은 선수의 가치를 안다. 박태환의 아시안게임 직후 각 포털에는 ‘잘했다 박태환’이라는 실시간 검색어가 떠올랐다. 지난 10년간 쉼없는 노력과 투혼으로 세계적인 에이스들과 어깨를 나란히 해온 기적같은 선수를 향한 고마움의 표시이자 찬사였다.
다섯 살 꼬마는 스물다섯 청년이 될 때까지 하루 8시간 파란 물속에서 쉼없이 물살을 갈랐다. 바닥만 보는 수영이 재미있느냐는 우문에 "재밌어서 한다기보다 즐겁게, 재밌게 하려고 계속 노력하는 것"이라고 현답했다. “어느덧 대표팀에서 고참이 됐다. 책임감이 생긴다. 인천아시안게임 평영 50m에서 나보다 한 살 많은 김명환 선수가 역영하는 모습을 보고 감명을 받았다”고 했다. “막내로 시작해서 고참이 됐다. 많은 시간이 지났다. 처음 대표팀에 들어갔을 땐 고참 형들도 많았고, 국가대표로 훈련하는 것 자체가 마냥 즐거웠다. 베이징올림픽까지도 마냥 즐거웠다. 올림픽에서 큰 성적을 내고 보니 이후 즐거움 반 부담감 반, 정상을 지켜야만 하는 시간들이 지금까지 이어졌다”고 말했다. 박태환과 함께 베이징올림픽에 나섰던 세계적인 에이스들은 여전히 건재하다. 치밀한 자기관리와 과학적인 훈련법, 노련한 레이스 운영으로 세계 정상을 오롯이 지키고 있다. 1985년생 마이클 펠프스, 1984년생 라이언 록티는 여전히 현역에서 맹활약중이다. 2008년 베이징올림픽에서 8관왕 신화를 썼던 펠프스는 2012년 런던올림픽에서도 4관왕에 올랐다. 27세의 나이였다. 록티 역시 27세 때인 2011년 상하이세계수영권 개인혼영 200m에서 세계신기록을 작성했고, 2년 후인 지난해 스물아홉의 나이로 대회 2연패에 성공했다. 일본 수영영웅 기타지마 고스케 역시 아테네 베이징올림픽 2연패에 이어 31세에 나선 런던올림픽 혼계영 400m에서 은메달을 목에 걸었다. 스물다섯 박태환의 청춘은 진행형이다. 박태환 레이스의 묘미는 ‘반전’에 있다. 후반 350m 이후 '폭풍 스퍼트'는 언제나 기대감을 품게 한다. 처졌다고 모두가 낙담하는 순간 거침없이 치고 나오는 '기적의 레이스', 세월을 거스르는 스피드는 뒤로 갈수록 강해지는 박태환의 수영 인생과도 닮아 있다. 박태환의 명품 스트로크를 보지 못할 날이 올까봐 가끔은 두렵다는 고백(?)에 박태환이 힘주어 말했다. "‘수영선수 박태환’은 내 인생에서 가장 큰 부분이다. 은퇴하는 날이 언제일지는 모르지만 제일 큰 환호와 큰 박수를 받으며 내려가고 싶다. 내가 꿈에 그리던 목표를 이루고 떠나고 싶다. 가장 아름다울 때 수영 인생을 마감하고 싶다. 정상을 이미 경험했고, 오르내림을 반복했지만, 떠나는 날은 꼭 다시 정상을 찍고 내려오고 싶다." |